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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련_무쿠프랑

그날 밤은 유독 시끄러웠다. 자신의 오래된 제자 프랑은 사실 연인 사이라고는 하지만, 자주 얼굴을 맞대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었다. 영상통화나 홀로그램으로 대화를 나눔마저 애정표현이라면 그러할 테지만, 마피아의 고위층인 무쿠로와 프랑은 쉬이 시간을 내기 어려운 곳에 있다. 최근 뒷골목의 고함이 높아지고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는 만큼 무쿠로는 한동안 프랑을 보지 못하리라 생각했다. 제 애인이었지만 서로의 사생활을 지킬 정도의 배려를 하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그 프랑이 누구인가. 늘 만인의 생각을 뛰어넘고, 별 희괴한 짓을 일삼는 그였다. 6월 8일 늦은 저녁, 프랑은 급작스럽게 무쿠로의 방으로 쳐들어왔다. 곧 할 일이 많아질 것 같은 예감에 편히 쉬기 위하여 크롬에게만 알린 채 입을 다물고 별장에 왔건만, 그 노력을 가뿐히 무시하며 프랑은 무례하게도 창문을 통해 침입했다. 무어가 그리 당당하다고 간대로 방안을 휘휘 둘러보는 프랑은 편한 사복에, 평소에 볼 수 있던 커다란 모자를 쓰지 않았다. 개구리의 형상을 띤, 귀를 덮는 방한용 모자와 같은 것을 만지작거리는 모양새가 썩 어색한 듯싶었다. 자신의 시간을 침해받은 무쿠로는 얼굴을 찡그릴 법도 했지만, 오랫동안 마주할 여유가 없으리란 생각에 이르자 단념하듯 눈을 몇 번 깜빡이며 프랑에게 몸을 돌렸다.

 

“무슨 일이죠?”

“어라, 스승님 아직도 준비 안 하셨네요.”

“준비라….”

 

무쿠로가 말을 뱉는 도중 커다란 소음이 귀를 때렸다. 지금 상황에선 육성으로 말할지라도 들리지 않으리라 생각한 그는 환각을 사용해 물음표 형상을 만들어냈다. 그에 프랑이 창문을 활짝 열며 무언가 밝은 빛이 발하는 곳을 가리켰다. 비행기? 여객기보다 한참 작은 걸 보니 전용기인 듯싶다. 눈을 가늘게 뜨며 느긋하게 살피려 하자 프랑이 무쿠로의 옷장을 멋대로 뒤지며 옷을 몇 벌 꺼내 들었다. 프랑은 들어온 것처럼 창문에 몸을 걸쳤다.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자신의 옷을 멀뚱히 바라보며 이해하지 못한 듯 의문을 표하자 화살표 모형이 바깥에 놓였다. 무쿠로가 한 것과 같이 환각을 사용한 것이다. 조금 혼란스러운 와중 그는 프랑에게로 발을 옮겼다. 오늘까지는 시간이 꽤 있으리라. 바빠지기 전 제게 재롱을 부리려는 모양인데, 조금이라면 어울려주지 못할 것도 없다. 입매가 작게 올라간 프랑이 내심 기쁨을 표했다.

 

“이젠 어찌할 셈인지 말할 때가 되지 않았나요, 꼬마.”

“에에─, 이런 건 비밀이 묘미예요.”

 

프랑이 검지로 제 입을 가리며 눈을 살짝 감았다. 계속 캐묻고자 하면 그리할 수도 있겠지만, 프랑의 성격상 무언가 이익이 갈 것이 없다면 쉽게 입을 열지 않을 것이다. 무쿠로는 오랜만에 보는 프랑의 시건방진 태도에 묘한 익숙함을 느꼈다. 그래. 저게 바로 프랑이지. 오늘따라 행동이 조금 이상한 것 같더니만 되레 그것이 정상인 격이었다. 무쿠로는 어딘가에 도착하기 전까지 프랑과 가벼운 담소를 나누었다. 일에 치여 살다 보니 인간관계에 소홀해지는 것은 어찌 보면 어쩔 수 없지만, 이런 갑작스러운 일을 감행할 줄은 예상치 못했다. 예부터 제 예상 범위를 가뿐히 뛰어넘는 자임은 잘 알고 있었음에도 내심 언젠가 철이 드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회포를 풀고 있으니 비행기가 빠른 듯 벌써 천천히 착륙하는 기분이 들었다. 커다란 쇳덩어리가 바람을 유하게 가르는 것이 감각 너머로 느껴졌다.

 

“오야, 이건 꽤 멋지군요.”

“겨우겨우 수소문해서 찾아온 곳이니까요.”

 

섬을 둘러싼 환각의 기운이 선히 다가왔다. 아마 프랑이 타인에겐 보이지 않도록 평범한 바다로 위장하고 있음이겠지. 망망대해 속 위치한 섬은 이곳저곳을 다니며 보았던 경치 중 손에 꼽을 수 있었다. 그에게 이런 감각이 있을 줄 몰랐는데. 남을 위하는 꼴을 본 적이 없다. 바리아의 누군가가 살짝 언질을 주었을 가능성도 있으니, 온전히 그의 탁월한 감각이 있다고는 간대로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썩 중요한가. 지금 자신에게 남은 것은 사랑스러운 제 애인과 아리따운 섬에 도착한 사실뿐이다. 문득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하니 아직 하루가 지나진 않았다. 그렇게 오래된 시간이 흐르진 않은 모양이다. 어두워져 잘 보이지 않는 바다의 파도 소리가 기분 좋게 울렸다. 바다 표면에 반사되어 부스러진 별빛의 세편들이 반짝반짝 다채롭게 빛을 발한다. 제가 이리도 한가롭게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것이 얼마 만이던가. 프랑이 옆에서 무쿠로의 팔을 잡았다. 여기서 일평생 보내시겠어요, 스승님. 그것도 나름 괜찮으리. 프랑과 함께라면 이 야경이 질릴 때, 프랑의 존재를 재인식하고 또다시 홀릴 것이다. 무쿠로가 입매를 끌어 올리며 프랑의 손을 맞잡았다. 살짝 서늘한 밤공기에 따듯한 온기가 감돌았다.

 

한참을 바닷가 앞에서 서 있으려니 슬슬 날이 추워지기 시작했다. 앞으로 열대야가 영향을 미칠 날도 몇 남지 않았다. 물론 그들의 방은 최첨단 냉방 장치로 쾌적한 환경을 유지하겠지만, 이리 바깥에 나와선 무용지물이다. 손에서 팔까지 모두를 맞댄 둘은 살그머니 서로의 시선을 공유했다. 같은 바다를 바라보던 눈이 어둠 속에서도 반짝인 눈동자로. 이제 실내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 아무도 없는 섬에서의 하룻밤 동거가 예정되어 있던 터다. 이참에 모두에게서 숨어버린 후 세상에서 사라져보는 건 어떨까. 모두에게 한바탕 뒤집힐 기억 중 하나로 남는다는 것은 꽤 유쾌한 일이었다. 비현실적인 이야기를 그려내며 프랑이 이끄는 손을, 그 온기를 제게로 옮기려 해보았다. 자기만 믿으라는 둥 당당한 걸음걸이로 성한 숲을 지나가는 모습이 듬직하긴새로에 귀엽게만 했다. 문득 소리 내어 웃고 있던 자신을 깨닫자, 프랑의 따가운 눈총이 쏟아졌다. 그럼에도 무쿠로는 튀어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 없었다. 프랑도 그저 볼을 살짝 붉힐 뿐 군말 없이 앞장에 힘을 썼다. 섬 주위를 두른 환각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는 조용한 장막이었지만, 그 속에 든 것은 진실 된 것뿐이었다. 자연적인 장관만이 자신과 프랑을 감싸고 있다는 게, 그토록 기쁜 일이었을 줄 몰랐다. 둘이 풀 내음을 만끽하며 저달한 곳은 새하얗고 조그마한 집이었다. 푸르른 나무들 한가운데 멀뚱히 선 건물은 생각보다 자연스러운 용모를 자랑했다.

 

건물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런 섬 안에 주거 공간이 고작 집 한 채라. 썩 아쉽기도 했지만, 인간의 간섭이 많으면 많을수록 탁해지게 되어있다. 이런 공간을 오직 자신들만 알고 있다면, 그 또한 달콤한 일일 터다. 잠시 가해진 힘에 프랑 쪽을 돌아본 무쿠로가 얼굴에 의문을 표했다. 프랑이 손으로 가리킨 곳엔 조그마한 텃밭이 있었다. 설마 직접 식물을 키우고 있다곤 이야기하지 않겠지. 의심을 지닌 채 돌아보자 예상보다 더욱 괴란한 것이었다. 아무리 여름이 다가온다 한들 이런 아직 사계가 구별될 정도의 기후를 가진 곳에서 키울 수 있는 작물이 아니다. 필시 인위적으로 심어 놓았을 파인애플이 보여, 무쿠로는 환각으로 삼지창을 만들었다. 다만 평소의 개구리 모자가 없는 프랑을 찌르지도 못하고 그의 볼을 마구 잡아 늘일 뿐이었다. 더욱이 오랜만에 데이트에서 귀여운 장난을 폭력으로 대갚음은 썩 바람직하지 못하다. 무쿠로는 익숙하지 않은 자비를 베풀며 묘하게 끓어오르는 감정을 삭였다. 프랑은 그에 더욱 의구심이 들었다.

 

“스승님, 오늘 뭐 있어요?”

“쿠후후. 네가 온 게 특별한 일이죠.”

 

프랑의 표정이 이리저리 변했다. 무언가 바라는 것이 있는 듯해도 살짝 부끄러운지, 잠시간 끙끙 앓다가 휙 고개를 돌려 내렸다. 아직 보이지 않는 귀도 붉어졌으리라. 무쿠로가 괜히 프랑에게 더 붙으며 씩 웃어 보였다. 작게 최악, 하고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그는 그저 모른 체했다. 프랑의 환각이 안개의 형태로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곤 머지않아 사라졌다. 프랑은 맞잡은 손에 힘을 실으며 입장을 서둘렀다. 이끌려 어딘가의 방으로 들어가게 된 무쿠로가 눈에 들어온 시계를 살폈다. 어느새 하루가 지나있었다. 비록 지극히 늦은 밤부터지만, 그 둘이 하룻밤을 함께 지새웠다는 사실이 기꺼웠다.

 

“아직도 말해줄 생각이 없나요.”

“흐음.”

 

프랑이 잠시간 고민하듯 턱을 두 손가락으로 쥐었다.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지만, 어쩐지 더욱 즐거워 보이는 듯해 무쿠로가 그의 머리를 쓸었다. 보드라운 감촉의 모자가 손결에 쓸렸다. 실내는 꽤 따뜻한 편인데, 덥지 않을는지. 상냥한 손짓이 프랑의 모자를 벗겨내었다. 고민에 빠져있느라 제 모자를 무력하게 빼앗긴 프랑의 손이 그를 따라갔다. 무쿠로의 눈에 프랑이 지은 당황한 표정과 조그맣게 박혀있는 귀걸이가 보였다. 늘 모자들에 귀가 가려져 제대로 볼 일이 없었는데, 이런 귀걸이도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비밀로 할 생각이었는지 썩 마음에 들지 않은 듯한 태도가 바로 인식됐다. 무쿠로의 시선이 닿는 귀를 만지작거리며 프랑이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무반응을 고수하려 하는지, 음의 높낮이가 없었다.

 

“오늘 무슨 날인지 알고 있어요?”

“프랑이 내게 온 날, 이라고 기념이라도 하길 바라는 건가요.”

 

벽면에 걸린 달력을 힐끔 쳐다보는 무쿠로가 웃음을 지었다. 프랑의 눈이 다시금 생각에 잠기는 듯했고, 그의 의중을 살피려 무쿠로는 잠시간 기억을 되짚어 보기로 했다. 하지만 특별히 생각나는 일은 없었고, 프랑과의 기념일과도 달랐다. 진정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 무쿠로에게 프랑이 비틀린 미소로 화답했다. 아무리 미련하고 멍청한 사람이래도 이럴 수가 있나. 결국, 프랑은 제 품에 고이 모셔놓았던 조그마한 상자를 꺼내 들었다. 지금껏 견고한 환각으로 그를 가리고 있던 듯하다. 이 사랑스러운 애인이 과연 머뭇거리면서 전하고자 하는 선물은 무얼까. 유심히 바라보고 있으니 프랑이 한동안 상자를 매만지다 무쿠로에게 건넸다. 무쿠로는 기쁘게 선물 포장을 조심히 뜯었다.

 

“…이건?”

“Me의 마음을 담은 선물이에요.”

 

자신의 눈을 마주하는 프랑이 반짝 빛났다. 무쿠로가 심혈을 기울이며 단정히 뜯던 상자는 썩 무게감이 느껴졌었다. 커플 시계라도 몇 개 들었을까 싶었건만, 그의 눈앞에 놓인 것은 딱딱한 파인애플 통조림이었다. 두 손으로 입을 가리며 부끄러운 척해 보이는 프랑에 되레 무쿠로가 무안해지는 상황이 벌어졌다. 아까 전 찌르지 못한 프랑의 머리를 눈독 들이며 그의 처분을 고민하고 있을 와중, 프랑이 비웃음과 비슷한 것을 삼키며 무쿠로에게 다가왔다.

 

“스승님은 정말 멍청한 것 같아요.”

 

무쿠로가 들고 있던 상자며 통조림이 싹 사라졌다. 아, 환각. 어째서 자신이 알아차리지 못 했는가 고민할 새 없이 프랑이 제 한쪽 귀로 손을 옮겼다. 조그맣게 박혀있던 귀걸이를 뺀 프랑은 익숙하지 않은 귀걸이의 허전함을 느꼈다.

 

“귀 뚫려있죠? 멋진 척할 때 귀걸이 끼잖아요.”

“멋진 척이 아니라,”

“앞으로 싸움질 좀 하지 마요.”

 

프랑이 멋대로 무쿠로의 귀를 집어 제 귀에 걸려있던 귀걸이를 끼웠다. 그 손길이 썩 잘한다곤 할 수 없으나, 프랑이라고 생각했을 때 애정이 담긴 행위일 터다. 귀에 닿는 온도가 어쩐지 뜨겁게만 느껴졌다. 어느 쪽의 온도가 영점에서 멀지 알 수 없지만, 무쿠로는 프랑의 온도가 높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Happy birthday…. 뭔지 알긴 하죠?”

“…아.”

 

무쿠로가 달력을 살폈다. 자정이 넘은 오늘은 6월 9일로, 그간 별 신경 쓰지 않았던 제 생일이었다. 그래도 언젠간 생각하겠거니 싶었건만, 정작 당일이 될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함이나, 그를 프랑이 대신 기억하고 있음에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힘겹게 귀걸이를 꿰어주곤 탁자에 비치되어 있던 손거울 하나를 건넸다. 워낙 뚫려있던 자리이기에 특별히 아프거나 한 점은 없었지만 남에게 귀를 내어준 적은 처음이었기에, 무쿠로에게도 나름 어색한 체험이었다. 고작 이런 귀걸이 하나로 앞으로의 싸움이 없다는 건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프랑은 제법 원하는 투로 말을 뱉었다. 벌써 붙어있던 시간이 10년을 훌쩍 넘었다. 둘에 관한 것은 둘이 제일 잘 알았다. 제 귀에 잘 꽂힌 귀걸이를 살피는 무쿠로의 눈이 예쁘게 접혔다. 서로의 같은 부위에서 같은 물건이 빛나고 있음에 이어지는 연결 감이 썩 괜찮았다. 앞으로 바빠지긴 하겠지만, 조금 욕심부린 대가가 돌아온다 한들 제 쪽에서 무시하면 그만이다. 주어진 일의 처리보단 이 제멋대로인 애인을 살피는 것이 더욱 큰 업무이다. 그렇게 그들은 생일을 맞았다. 높게 뜬 달의 형체를 그리며 빛나는 달은 보름이었고, 그들 또한 하나로 합쳐져 구가 되었다. 비록 맛있는 케이크는 없을지라도, 사랑할 수 있었다. 프랑이 무쿠로의 목에 팔을 걸어 제게로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닿은 입술의 간질간질한 느낌을 상기하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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