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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녹슨 형상 위로 가라앉는 것이 있었는데, 그건 복수심이나, 원망, 혐오 같은 감정이 아니었다. 알 수 없게도 그건 행선지도 없는 ‘동경’, 누구에게 닿고 있는지도 모를 ‘그리움’ 같은 것들이었다. 이런 이해하기 어려운 감정에 번민하기는 싫어서, 가치 없는 일에 나를 소모하기는 싫어서. 표면적인 모습은 늘 강하고, 내 목적을 향해 무엇이든 하는, 잔혹한 사람이 되었던 거 같다.
흐린 날에 동경이란 것은 더욱 선명하게 빛났는데, 대상 없는 감정은 허무한 것과 같았기에 나는 이 빛과 어울리는 사람에게 그것을 바치기로 했다. 끝없이 휘몰아치기만 하는 ‘무언가’를 어찌 할 수가 없어서, 계속 내 안에 있다면 더 이상은 가치 없는 것이 아닐 터이기에. 이 두 눈으로 보기에 가장 따뜻하고, 흐릿하면서 또렷하고, 슬픈 빛이 나는 사람을.
하지만 그런 사람을 발견하기엔 이 세계는 너무 더러워요. 추악하며 지독해서 발 디딜 곳조차 없는 여기서 어찌 찾을 수 있을까. 환상 속을 몇 번을 돌아도, 원하는 사람을 만나는 그런 차례는 돌아오지 않았다.
자신의 이득만 눈앞에 두고,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떠벌리고, 헐뜯고 싶은 만큼 헐뜯고, 조롱하고 싶은 대로 깎아내리고. 죽이는 것마저 죄가 사라지는.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도 그에 합당하게 타인에게 선을 베풀지 않는 인간들.
나도 그럽니다. 부인하지 않아요.
한 사람, 한 사람 쓰러트린 후 찾아오는 명백함. 자신은 ‘처음’ 부터 그런 인간은 못됐지만 머리가 커 갈수록 발 아래에 쌓이는 절망은 늘어났다. 이렇게 깨어져 버릴 듯한 나도 누군가가 구해 준다면. 이 같은 식상한 투정은 틀림없는 오만이겠지.
그 미친 듯한 굴레 속에, 어쩌면 사실 벌써 닿았는지도 몰라. 그런 사람, 사실 이미 찾았는지도 몰라요.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흘러, 흘러 겨우 닿은 네가 얼마나 내 이상과 가까웠는지. ‘무른 사람’ 이라고는 했지만 차고 넘치는 이 기쁨이 어디 가지는 않았어.
생, 어느 쪽으로도 닿지 않는 것. 그 뒤에서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하는 사람. 바라봐오면서, 벌써 몇 번이고 가슴 한 편을 찢어놨던 네 미소.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되련만, 좌 우 어느 쪽으로 살펴봐도 이해가지 않을 행동들.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이미, 이미 날 버렸잖아요. 웃고 있는 그 많은 인간들 사이에서, 똑똑히 시선을 던져 놓고서 씁쓸히 입을 다문 뒤 고개 돌린 널, 이미 다 지켜봤는데.
하지만 너의 어리숙한 말들이, 태도가. 점점 더 널 원하게 해요.
내 그리움을 당신께 바칠게요. 부디, 네가 납득한다면 나를 받아들여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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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부터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 속에서, 문득 멈추어 섰을 때 내가 느끼는 건 즐거움, 만족감 같은 것이 아니라 ‘지독한 위화감’이었다. 무리 속의 나는 텅 비어있다. 그토록 바랐던 누군가들 사이에서 그들에게의 그 고마운 마음을 뒤로 하며, 세차게 도리질하고 부정하고, 억지로 가면을 만들어 웃어도, 불변히 나는 원점 위에 서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런 나를 누가 알아챌까 두려워서 밖으로 보이는 자신은 몇 겹의 가면을 쓴 채.
그런 나에게 내가 익숙하지 않아서, 자신이 무섭기까지 했어. 이런 내가 남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미소 지어 보이는 건 모두 가식이 아닐까 하고. 가장 괴로운 것은, 사람마다 별로였다가 질려버리는 타이밍이 따로 있었는데- 그 상태에 떨어져도 계속 웃어보여야 한다는 거야. 나는 나도 속이고 있는 거겠지.
이 자리에 멈춰 서 있는 이유는 분명, 애정결핍. 필시 다 토해내도 될 내 본심을 지레 혼자 겁먹고 꼭꼭 가둬 놔. 남에게 가짜를 보여 놓고 나를 이해해주길 바라는 건 사치겠지. 하지만, 정말로,
누군가 이런 나를 익숙하다 말해 주었으면.
본인에게 돌리는 화살 대신에 쉽게 원망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준다면.
그런 나를 만남의 시작부터 알아본 듯한 녀석이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그를 볼 때마다 시선을 피하고, 답답한 불안감에 몸을 떨었다. 그와 반대로, 내가 ‘미워하게 해 달라’고 부탁할 수 있는 이가 있다면 너 뿐이라는 생각에 점점 죄책감. 널 보는 한 시선에 다른 두 감정으로 고개를 돌려. 나는, 정말 너에게 그런 터무니없는 욕심을 강요해도 되는 걸까.
무엇 때문에 내 이런 태도에도 나를 등 돌리지 않는지, 내 속내를 파악했다면 왜 혐오하지 않는지. 갈수록 생각이 바보스러울 만치 편해지고, 그와 같은 공간에 있을 때에 안심해 있는 자신을 보았다.
괜찮아, 괜찮을 거야, 괜찮다 라며, 그래도 어지러워, 날 찾아내 줘. 내가 먼저 뱉어내지 않아도 네가 먼저 날 끌어내 줘, 하는. 가차 없는 욕망.
멍청함과 오만, 파란 색 물감으로 얼룩진 미련. 네 얼굴 앞이 흐릿하게 물들어가.
이 공백은 어디로. 어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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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짝거리는 빛 아래에서, 퍼뜩 정신을 차린 순간 내 밑에는 조용하게 네가 자리해 있었는데 나는 그런 너의 입을 틀어막았다.
당신의 손은 차갑고, 앙상했고, 파들거리며 작게 떨려왔는데, 그렇기에 이제껏 한 번 세상 밖에 나온 적 없는 서러움이 글썽거렸다.
아아, 찾았다ㅡ 알 수 없는 얼굴을 하고 있는 너도, 그렇게 생각해줄까.
아아, 미안해ㅡ 알기 힘든 신념 속에서, 타인의 마음이란 걸 처음으로 마주했어.
ㅡ 비워진 어딘가가, 채워졌다고는 말하지 않으며 시큰거렸지만 바보처럼 살풋, 웃어보였다.
어른스러워 보이는 건 모두 포장, 내일은 한 없이 아이 같도록.